가와시마 요시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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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와시마 요시유키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육군대신, 조선군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898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대학을 거쳐 주요 보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1935년 육군대신으로 취임했다. 육군 내 파벌 다툼 속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2·26 사건을 막지 못하고 예비역으로 편입되었으며, 종전 직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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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시마 요시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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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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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가와시마 요시유키 |
원어 이름 | 川島 義之 |
출생일 | 1878년 5월 25일 |
사망일 | 1945년 9월 8일 |
출생지 | 에히메현, 일본 |
묘소 | 아오야마 영원 1イ9-21 |
군 경력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898년 - 1936년 |
최종 계급 | 육군 대장 |
지휘 | 일본 제국 육군 제19사단 일본 제국 육군 제3사단 조선군 |
기타 이력 | |
육군 대신 | 육군 대신 |
2. 약력
에히메현 출신으로, 1878년 5월 25일 무사 가와시마 우이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마쓰야마 시립 외측 심상 초등학교, 에히메현 심상 중학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
2. 1. 군 경력
에히메현 출신으로 1898년 육군사관학교를 10기로 졸업하였다. 동기생으로는 훗날 할힌골 전투 때 관동군 사령관이었던 우에다 겐키치가 있다. 1908년 육군대학 20기를 졸업하고, 작전자재정비회의 간사장, 육군성 인사국장, 근위 보병 제1사단장, 제19사단장, 제3사단장을 거쳤다. 이후 육군 서열 제3위 자리인 교육총감부 본부장을 거쳐, 조선군 사령관, 군사참의관을 거쳤다. 1934년 대장으로 승진하였고, 1935년 육군대신에 취임하였다. 당시 육군 내에서는 통제파와 황도파의 대립이 극심하였는데, 그는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아서 타협점으로 육군대신으로 선임될 수 있었다. 그는 황도파의 거두 마사키 진자부로와 아주 친했지만, 무색무취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양 파벌은 그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의 재임 시절 2·26 사건이 발발하였고, 그는 이 쿠데타에 동조하는 듯한 고시문을 도쿄경비사령부에서 발표하였다. 그러나 쿠데타는 쇼와 천황의 반발로 실패로 끝났고, 그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 책임을 지고 예비역 처분되었다.[3]2. 2. 육군대신 재임과 2·26 사건
1934년 대장으로 승진한 가와시마 요시유키는 1935년 하야시 센주로의 뒤를 이어 육군대신에 취임하였다.[1] 당시 육군 내에서는 통제파와 황도파의 대립이 극심하였는데, 그는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아 타협점으로 육군대신으로 선임될 수 있었다.[4] 그는 황도파의 거두 마사키 진자부로와 아주 친했지만, 중립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양 파벌은 그를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하였다.아이자와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 하야시 센주로는 후임으로 와타나베 조타로 교육총감, 가와시마, 우에다 겐키치 조선군 사령관, 니시 요시카즈 도쿄 경비 사령관을 고려했으나, 가장 문제가 없어 보이는 가와시마를 선택했고, 오카다 총리도 그를 적임이라고 평가했다.[4]
가와시마 요시유키의 재임 시절 2·26 사건이 발발하였고, 그는 이 쿠데타에 동조하는 듯한 고시문을 도쿄경비사령부에서 발표하였다. 그러나 쿠데타는 쇼와 천황의 반발로 실패로 끝났고, 그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 책임을 지고 예편 처분되었다.[3]
2. 3. 말년
2·26 사건 당시 가와시마 요시유키는 쿠데타에 동조하는 듯한 고시문을 도쿄경비사령부에서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쇼와 천황의 반발로 실패하였고, 그는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예편되었다.[3] 이후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 9월 8일에 사망하였다.3. 인물 및 평가
육군사관학교 10기 졸업 시 110위였다. 동기로는 마쓰키 나오아키, 니시 요시카즈, 우에다 겐키치 등이 있다. 육군대학교 20기 졸업 시 6위였다.
오카다 내각에서 육군 대신으로 취임했지만, 당시 육군은 통제파와 황도파의 대립이 격화되어 있었고, 가와시마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육군 대신으로 선출되었다. 아이자와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 전임 하야시 센주로 육군 대신은 후임으로 처음에는 와타나베 조타로 교육총감, 가와시마, 우에다 겐키치 조선군 사령관, 니시 요시카즈 도쿄 경비 사령관 순으로 생각했지만, 가장 문제가 없어 보이는 가와시마를 선택했고, 오카다 총리도 가와시마를 무색으로 적임이라고 평가했다[4]。 그러나 중간파였기 때문에 양 파의 통제를 하지 못해 2·26 사건을 막을 수 없었다. 양 파는 물론 청년 장교들까지 그를 괴뢰로 이용하려 했던 점에서 가와시마에 대한 주변의 평가를 알 수 있다.
2·26 사건 당시 육군 대신으로서 반란 부대에 이해를 보이는 듯한 육군 대신 고시를 도쿄 경비 사령부에서 발표했다. 이후 쇼와 천황의 의향에 따라 반란 부대는 진압되었다.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건 후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2·26 사건의 배후로 여겨지는 마사키 진자부로와 친했던 것 같다.
마쓰야마 중학교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제자였다. 다만, 가와시마는 그가 그다지 훌륭한 선생님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영문학자 가와시마 겐은 증손자이다.
4. 서훈
4. 1. 위계
참조
[1]
웹사이트
Biography of General Yoshiyuki Kawashima
http://www.generals.[...]
[2]
서적
Axis History Factbook
[3]
서적
Revolt in Japan
[4]
논문
陸軍の政治介入の淵源について(Ⅱ)-陸軍予算と二・二六事件-
[5]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28-03-10
[6]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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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1933-02-0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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叙任及辞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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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02-08
[8]
간행물
辞令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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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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